교회주보

2015년 11월 1일 교회주보


2015-11-01 4,343 연세중앙교회

2015년 11월 1일 교회주보

연세중앙교회 ( www.yonsei.or.kr )


제목 : 예수 증거에 생애를 바친 사람 바울 (고후 4:1~2)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죄로 영원히 멸망할 인류를 사랑하시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사 십자가를 지게 하심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주셨으니

십자가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비밀을 알지 못한 채

멸망으로 질주하는 인류에게 십자가의 오해를 풀어주고자

자신의 생애를 아낌없이 예수 증거에 바친 사랑의 사도며

바울 서신들은 실제 복음 전도를 하면서 체험한 사건들을 기록한 책이다.

전도자로서 바울의 삶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하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생각할 정도로 엄청나고 위대해서

그의 삶을 말하는 일조차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바울이 수많은 핍박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전도자로서 위대한 삶을 산 것은 바울 개인의 힘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힘과 능력을 주셨기에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린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핍박을 피해 디아스포라(Diaspora)를 찾아다니면서 전도했다.

디아스포라는 유대왕국이 패망하여 바빌로니아로 유배당한 뒤

이방인들 사이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 혹은 유대인 공동체를 말한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전하는 자가 있으면

아무리 먼 곳에 있는 디아스포라라도 악착같이 찾아가서 핍박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전도한다고 하여 옥에 가두거나 죽이지 않는데도

아무리 전도하자고 해도 실행하지 않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주님 앞에 가는 날 전도하지 않은 심판을 어찌 받으려 하는지 두렵기만 하다.

바울은 평생 매 맞고 옥에 갇히는 위험을 무릅쓰면서 전도했다.

동족들로 말미암아 받는 핍박이 심히 괴로우나 낙심치 않은 것은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은 날로 새롭도다”라고 고백하며 전도했다(고후4:16).

터키에는 바울이 전도한 소아시아 교회들이 있다.

자동차를 타고 가기에도 힘든 산악지대에

바울이 세운 교회 흔적이 있고, 핍박 받은 흔적이 생생히 남아있다.

바울은 처음엔 복음 증거하러 아시아로 가려 하였으나

유럽인들이 어서 와서 복음 전해주기를 간청하는 환상을 본 후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전도지를 유럽으로 바꿨다.

바울은 성령이 인도하시면 자기의 계획을 완전히 포기하는 사람이었다.

바울의 삶은 성령이 인도하시는 삶이요, 성령에 압도당한 삶이요,

그러기에 상상이 안 될 만큼 위대한 삶이었다.

만약 비울이 예수를 믿고 나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그를 핍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전하지 않으면 화가 미친다고 말하며 결사적으로 복음을 전했다(고전9:16).

바울도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 중 하나였다.

나사렛 목수의 아들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했으니,

유대인의 수치요, 민족적 반역이요, 하나님께는 신성 모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바울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이후 바울의 가슴은 불타올랐다.

자신처럼 예수를 오해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려고

디아스포라마다 찾아가 예수를 전했다.

유대인들은 그런 바울을 엄청나게 핍박했다.

그러나 바울은 동족의 핍박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복음 증거에 미쳤다.

예수를 몰랐을 때는 동족와 똑같이 예수를 핍박했으나,

예수를 알고 나니 그것이 죽을 짓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그립바 왕에게 신문받을 때에도 담대히 예수를 증거하였고,

베스도가 소리치며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행26:24)

할 때도 바울은 아그립바 왕을 향해 말했다.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행26:29).

우리도 예수를 알되 바울처럼 미칠 정도로 알아야 한다.

바울은 과거의 자신과 똑같이 예수를 오해하는 유대인들을 설득해서

예수에 대한 오해를 벗겨주는 일에 미쳤던 것이다.

만약 도둑 누명을 쓰고 뭇사람에게 붙들린 사람이 있다고 하자.

내가 그 사람의 결백을 알기에 “이 사람은 도둑질한 사실이 없습니다. 내가 증인입니다.

이 사람은 나와 함께 있었습니다“라고 변호할 때

사람들이 오히려 내게 돌팔매질을 하며 왜 도둑놈 편을 드느냐고 한다면

이 얼마나 답답한 일일 것인가?

이 때 나의 위기를 모면하려고 무고한 사람이 법정에 끌려가서 징역을 선고받고

형벌을 당하게 내버려 둘 것인가?

아니다. 끝까지 그가 도둑이 아니라고 변호해주어야 한다.

이런 일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큰일이

예수를 잘못 아는 오해를 어떻게 풀어줄지 고민하는 일이다.

바울은 바로 그 일에 미쳤다.

“나도 너희처럼 예수를 모질게 핍박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옥에 가두고

죽일 때에 가표를 던질 만큼 앞장서서 핍박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고 보니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너희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아라.”

그러나 아무리 말해도 믿지 않으니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분의 누명을 어찌 모른 척할 수 있는가?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볼 때 답답한 심정이 밀려 나와야 예수를 전할 수 있다.

여러분 속에 이런 답답함이 있는가?

예수 믿으라고 하면 다른 종교를 믿는다고,

종교는 다 같은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어떻게 기독교가 다른 종교하고 같은가?

어떻게 예수가 공자나 석가나 소크라테스와 같은가?

그들은 사람의 자식이요 피조물이지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조물주이시다.

우리 인간은 모두 죄인이었으나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의롭게 했다고 말해주어야 한다.

예수를 오해하는 자들 앞에서 예수를 바르게 변호하고 예수가 어떤 분인지 말해주어야 한다.

속에서 불타는 이런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 앞에 의리 없는 인간이다.

예수를 모르고 오해하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에 대한 오해를 풀어줄 때

얼마나 주님이 기뻐하시겠는가?

우리가 예수 편에 선다고 하는 것은 목적 없이 서는 것이 아니다.

속에서 울분이 솟아나야 전도자가 된다.


이 땅에 불신자가 있는 한...영원한 개척교회!

연세중앙교회      
YBSTV방송국      
흰돌산수양관      
교회신문